갈라디아서 초반부는 바울이 왜 사도가 될 수 있었는지의 기원과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모세의 시내산이 위치했던 아라비아로 3년 정도 갔던 얘기도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이전에 예수믿던 자들을 죽이고 가두고 했던 자신의 율법적인 행위를 반성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인지 갈라디아서 곳곳에서는 ‘율법’과 약속, ‘율법’과 믿음을 대비시키며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대표한다고 말합니다. 사래가 낳은 이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을 대표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반으로 가면서 성령으로 행하는 것과 육체 즉 죄의 본성을 따라 행하는 것을 대비하면서 율법의 행위로는 이를 극복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할례와 무할례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강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라는 헬라어가 과거시제를 사용한 이유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건이 그의 일생을 완전히 돌려놓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직 복음으로, 십자가로 해석되지 않은 사건은 바울의 삶에서 아무런 의미를 주지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의 전성기를 지나면서 바울은 그 시대를 십자가와 복음으로 해석했듯이 팍스아메리카나, 미국의 전성기를 지나는 우리도 자본주의의 번성을 노래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복음을 통한 영원한 구원을 외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 이제 율법으로부터 갈라서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갈라디아서라고 했나요? 좌파와 우파, 남과 북, 친중과 친미, 북과 남, 한국과 일본, 전라도와 경상도, 이런 것들로 갈라 설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성령의 소욕이 육체의 소욕으로부터 갈라서야 할 것입니다.